[역사인물기행] 여성독립운동가 연미당 선생, 부친, 남편 모두가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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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기행] 여성독립운동가 연미당 선생, 부친, 남편 모두가 독립운동가....!
  • 최창훈 기자
  • 승인 2019.07.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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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연미당 선생의 모습 / 국가보훈처 제공
사진 = 연미당 선생의 모습 / 국가보훈처 제공

[우먼포스트] 최창훈 기자 =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본지에 독립운동가의 일대기를 작성하기 위해 인터넷 기사를 서핑하다가 지난4월 연미당 선생의 부친, 숙부, 남편, 딸이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기사와 국가보훈처가 2018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하였다는 보도자료를 읽었다. 그리고 보도자료와 백과사전을 정리해 보았다.

 

연미당(한국 한자: 延薇堂, 또는 연충효  1908년 7월 15일 ~ 1981년 1월 1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부친인 연병환(延秉煥·1878~1926) 선생은 중국에서 세관공무원으로 일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고, 숙부인 연병호(延秉昊·1894~1963) 선생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과 함께 광복 후에는 1·2대 국회의원으로 헌신했다.

남편인 엄항섭(嚴恒燮·1898~1962) 선생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해 항일전선을 구축했고 임정 선전부장과 주석판공비서를 맡은 백범 김구 선생의 최측근이었다.

딸인 엄기선(嚴基善·1929~2002) 선생은 부친 엄항섭 선생을 도와 중국 측 방송을 통해 임정의 활동 상황과 중국에서의 일본군의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 동포들에게 알렸다.

사진 = 연미당과 엄항섭 선생의 결혼식 / 국가보훈처 제공
사진 = 연미당과 엄항섭 선생의 결혼식 / 국가보훈처 제공

연미당 선생은 부친, 숙부, 남편, 딸이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임정이 일제를 피해 상하이에서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강, 충칭까지 8000㎞의 대장정을 김구·이동녕·이시영 선생 등 임정 요인들을 모시며 함께했다.

1908년 7월 15일 북간도 용정해관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아버지 연병환이 북간도에 해당하는 지린성 룽장에서 3월 13일의 만세 운동을 지원하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2개월 동안 체포된 일이 있었던 뒤 아버지와 함께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당시 일본 영사관은 항일 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을 압박했고 중국은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했다. 

이 날 중국군의 발포로 17명이 사망했고 중국 세관은 당시 아버지 연병환이 일하던 용정 해관에서 톈진 세관으로 전근 명령을 내렸다. 

1919년 6월 18일 송별회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급습한 일본 영사관의 경찰들은 연병환에게 아편이 발견되었다고 조작하여 체포하였으나 귀화 중국인 신분이었던 그는 2개월 동안 구금되고 풀려나게 된다. 

10월 상하이의 세관으로 전근되면서 연미당을 비롯한 가족들은 상하이로 이사하게 되었다.

상하이로 망명한 이후에는 상하이의 인성학교와 진강의 진강여자중학교를 다녔으며 1926년 아버지가 진강에서 사망한 이후 상하이에 정착했다.

이후 1927년 3월 20일 프랑스 조계 공무국에서 근무하던 공무원이자 독립운동가인 엄항섭과 결혼했고,이듬해인 1928년 1월 21일 딸 엄기선을 낳았다.

연미당은 같은 해 11월 상하이에서 조직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과 1930년 8월 결성된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에서의 임시위원을 통해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와 역량 확보를 위해 활동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1932년 4월 29일 있었던 훙커우 공원 사건에서 윤봉길의 자결용 도시락 폭탄의 보자기를 만들었으며 일제의 추적을 피해 1936년 5월까지 장사를 향해 임시정부가 이동할 때 임시정부 요인들을 수행하였고 장사에서 열린 3당 통일회의에서 이운한의 저격을 받은 김구를 간호하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장사로 이동한 뒤부터 연미당은 아명인 연미당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본명보다 연미당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1938년 4월 15일에 열린 안창호의 추도식에 참석하여 이복영, 김정숙과 애도가를 부르기도 하였고, 같은 해 10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여 선전과 홍보에 참여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한 뒤에는 한국혁명여성창립동맹을 구성하고 한국애국부인회의 조직부장을 맡았다.

한편 1943년 5월 10일, 충칭 한인사회에 종전 후 한국을 신탁 통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6개 대표 정당 및 단체들이 모여 재중국 자유한국인대회를 개최하였을 때,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어떤 외세의 압박과 간섭도 반대할 것을 결의하고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한국 민족의 완전 독립과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였다.

광복 이후인 1946년 7월 광복군 7지대와 함께 미군함을 타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이후에는 대외활동을 하지 않고 남편의 내조에 힘을 쏟았으나 남편이 납북된 이후의 경제적 어려움, 남편이 월북했다는 오해와 중풍으로 인해 고생하던 중 1981년 1월 1일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본 기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인물 중심으로 조명한 글로써, 우먼포스트 구독자들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해 제작된 기획기사입니다. 따라서 사실정보만을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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