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美人)역사기행] 사회주의계 여성 노동운동가이자 해방후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이효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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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美人)역사기행] 사회주의계 여성 노동운동가이자 해방후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이효정 선생!
  • 최창훈 기자
  • 승인 2019.11.18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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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포스트] 최창훈 기자 = 일제에 목숨 걸고 항거했건만 정작 해방된 조국에서 버림받고 통한의 세월을 보낸 좌파 독립운동가 이효정 선생이 있다.

이효정 선생은 1913년 봉화에서 항일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동식씨와 작은 할아버지 이원식(독립유공자)·이경식(독립유공자)씨도 애국계몽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펼쳤다. 이원식씨의 큰아들 병린씨와 작은아들 병기씨, 이경식씨의 딸 병희씨(독립유공자)도 그 맥을 잇고 있다. 

1930년대 초 선생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 나가 만세를 부르고 종로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으며, 3학년 때는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무기정학을 당했다.

졸업후 서울에서 조직되어 반제국주의 운동, 학생 운동, 노동조합 운동, 독서회, 농민 운동을 전개한 '경성 트로이카'의 활동가로 1934년 1월에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경성트로이카 활동가 250여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또한 1935년 11월 경성에서 '경성지방 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회'에 가담해 동지 규합과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다 다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고문 후유증으로 치료 받는 중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박두복과 결혼해 울산의 벽촌에 있는 시댁으로 내려가서 살다 해방을 맞았다.

선생은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 울산지부에서 활동했는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기도 했던 남편이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 시아버지를 비롯한 시댁 친척들이 울산보도연맹 학살사건 때 많이 죽었고, 시동생은 간첩으로 몰려 자살했다.

2남 1녀의 아이들과 함께 남한에 남겨진 그녀는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 찍혀 어렵게 생계를 꾸려갔다.

요주의 인물이 된 선생은 학교 교사였던 그녀는 교단에서 쫓겨났고,  취직하는 곳마다 형사가 따라붙어 쫓겨나기 일쑤였고, 이사 가는 곳마다 감시가 붙었다. 1950년대 말 남편이 남파간첩으로 활동하다 또 다시 월북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로 인하여 영장 없이 수시로 사찰기관에 연행돼 고문과 취조를 당하면서 고문으로 팔목이 부러지는 장애를 입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였다. 

시인으로 등단된 후 1989년 도서출판 경남을 통해 <회상>이란 시집을 일흔여섯이 되던 해에 냈다. 이후 마산문인협회와 경남문인협회에서 활동을 하며 꾸준히 작품을 냈으며, 1995년 역시 도서출판 경남을 통해 <여든을 넘기며>라는 두 번째 시집을 남겼다.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쓰일 데가 있다면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 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 이효정 '약속' -

참여정부 시절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되면서 93세 때인 2006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포장을 받았다. 2010년 8월 14일 9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 본 기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속에서 사라지고 잊혀진 여성 영웅을 조명한 글로써, 우먼포스트 구독자들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해 제작된 기획기사입니다. 따라서 사실정보만을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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