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美人)역사기행] 독립운동가의 어머니 조신성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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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美人)역사기행] 독립운동가의 어머니 조신성 선생님!
  • 최창훈 기자
  • 승인 2019.12.23 0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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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조신성 선생 / 국가보훈처 제공
사진 = 조신성 선생 / 국가보훈처 제공

[우먼포스트] 최창훈 기자 = 독립운동가 조신성(1873~1953.5.5) 선생은 여자의 몸으로 항일무장투쟁과 군자금 모집을 위해 헌신했다. 

맹산독립단을 만들어 이러한 일을 수행했고, 가슴에 다이너마이트, 탄환 등을 품고 며칠씩 굶기도 했고 순검과 격투를 했으며, 더불어 교육활동과 여성들의 권리 향상에도 힘썼다. 

근우회를 통해 여성들의 경제 의식을 일깨우고 직업을 가지도록 노력했으며, 안창호와 함께 평양 진명여학교를 운영했다. 

선생의 정신은 1943 지인의 인터뷰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오로지 조선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다. 아마 그가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날는지 모르지마는 그는 숨이 넘는 그 마지막까지 조선을 생각할 뿐, 그가 두고 가는 친척, 자손은 한 사람도 없다. 물론 그에게는 죽을 때까지 용서 못하는 일이 있다. 알면서 조선을 걱정하지 아니하는 조선사람, 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자는 그에게 있어서 모두가 죽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 선생에 대한 지인의인터뷰 중. 1943-

조신성 선생은 어린시절과 결혼생활이 모두 불우했던 선생은 이에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았다.

선생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때 아버지는 집을 나가버린 상태였으며 어머니는 선생이 9세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아가 된 선생은 고모와 함께 살다가 16세에 결혼, 그러나 남편은 가산을 탕진한 후 아편을 먹고 자살해 버렸다.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근대적인 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배움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24세 되던해 이화학당과 상동 소재 교원양성소를 졸업한 후 상동 소재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28세되던 해에는 이화학당 사감으로 재직하였다. 이때 이준과 함께 한국최초의 조선부이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그 후 선생은 도일하여 일본성경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귀국 후 부산규범여중학교, 평양진명여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선생은 맹산독립단을 주도적으로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과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독립단 활동을 하는 도중 독립단원들이 일제 경찰에게 붙잡히자 선생은 경찰의 팔을 붙잡고 군도를 빼앗아 던져서 이들을 달아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공무방해죄로 징역 6개월을 언도 받고, 옥고기간이 끝날 즈음 1921년 11월 다시 맹산독립단사건으로 선생은 징역2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옥교기간이 끝난 후 선생은 평원군 한천에서 사숙을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대동군 대평에서 취명학교를 운영하였다.

1928년에는 평양에서 근우회 평양지회를 조직하고 평양여성들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동년에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1930년에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근우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자 선생은 평양에서 여성들을 위한 실업운동과 교육운동에 매진하였고, 1930년 12월 여성실업장려회를 조직하였고, 1932년에는 평양여자소비조합조직준비회를 개최하여 여성 경제기관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1934년 ‘신가정’의 한 기자가 선생에게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는지 물었다. 이에 조신성 선생은 “가슴에다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시시로 변장을 해가며 깊은 산 속을 며칠씩 헤매고 생식을 해가면서 고생을 했다. 주막에서 순검에게 잡혀 가지고는 격투하거나, 오도가도 못하고 끼니를 굶어가며 산속에서 며칠씩 숨어 있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취명학교와 교육원을 운영하면서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하여 교육운동에 힘썼다. 교육원을 설립하기 위해 그는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4백여원을 확보하였다.

선생은 평생을 민족의 독립과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위해 헌신하였다. 평생을 일년내내 산동주 치마저고리 한벌을 빨아입을 정도로 몸소 검약한 생활을 실천하였으며, 한번도 사를 넣을 줄 모르는 지나친 결벽이 사람을 설복시킬 줄 알지마는 감읍시키는 능을 피울 줄 모른다 고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험난한 항일운동에서 지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갔던 것은 선생의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때문이었습니다.

선생은 해방이 된 후  평양에서 조선민주여성총동맹 북조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45년 11월 거부하며 월남했다.

그 후 선생은 대한부인회 부총재를 역임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 1953년 부산신망애 양로원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남한에서의 쓸쓸한 삶을 마감하였다.

 

 

 


※ 본 기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속에서 사라지고 잊혀진 여성 영웅을 조명한 글로써, 우먼포스트 구독자들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해 제작된 기획기사입니다. 따라서 사실정보만을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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